달력

7

« 2025/7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결혼하기 전에 나는 비밀연애를 해왔다. 다른 외국인 친구들은 다 공개연애를 하고 헤어지고 그랬는데 말이다. "내가 왜 연애에 있어 당당하지 못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남자친구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반대를 심하게 했던 우리 가족때문인가? 그런 문화권에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외국인 남자친구를 둔 것이 큰 죄를 저지른 것만 같이 느꼈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 갈 길은 내가 정한다고 고집을 피워 남자친구를 따라 한국에 와서 공부를 하기로 결심을 했지만 100% 그 죄의식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았다. 남자친구랑 데이트 나갈 때도 미얀마사람같이 생긴 사람 보면 신경 쓰이고, 아는 미얀마 학생들과 우연히 마주칠까봐 살피고 돌아다녔다. 특히 내 연애 사실을 미얀마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걱정했던 것이었다.

    이유는 미얀마는 한국보다 더 심한 가부장제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미얀마 사회는 외국인 남자와 사귀거나, 결혼을 한 여자는 죄인 취급 받고, 외국인 여자와 사귀거나, 결혼을 한 남자는 왕자 대접을 해주는 사회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된다. 이해가 안 되지만 나는 한번도 그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 나는 비겁했다. 아직도 비겁하다. 이유는 그에 따른 불이익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나는 한국인 남편을 둔 이유로 내 취업 기회를 2번이나 잃었다. 내가 원하고 원했던 주한 미얀마 공기관에서 통.번역사 자리가 비웠고, 지원할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면접 후에 탈락됐다. 나는 면접 들어가기 전에 미얀마 공기관에서 일하는 한국인의 "ㅁㅁ님은 개방적인 사람이셔요." 라는 말을 듣고 "남편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는 나를 탈락시키지 않겠지"라고 굳게 믿었다. 면접 시에 비자 타입을 물어보셔서 "전 F-6 비자입니다." 라고 그랬더니 그게 무슨 비자냐고 해서 '결혼 비자'라고 답했다. 면접 끝나고 집에 돌아와 전화를 계속 기다렸지만 내가 기다린 전화는 끝내 안 왔다. 나중에 알게 된 정보는 면접장에 유일하게 미얀마 전통의상을 입고 온 친구가 뽑혔다. 이제 미얀마는 민주주의의 길을 걷고, 영국인 남편을 둔 국가자문이 나라를 이끌고 있는 시대라 개방적이고 진보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미얀마 공기관도 아직까지 보수적인 세계에 갇혀있었던 것이라고 본다. 아무튼 자기나라의 의상을 입고 면접 보러 온 애는 독특했고, 전통 의상을 아끼는 사람으로 판단되어서 뽑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추측은 다른 면에도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외국인(한국인)과 결혼을 했기 때문이라는 배타적인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콤플렉스이자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었기에 누구한테 뭐라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나의 의심이 오늘 현실로 다가갔다. 오늘 아침에 친구를 통해 또 다른 주한 미얀마 공기관에 한-미얀마어 통.번역직 채용 공고를 접했다. 그래서 공고에 나와 있는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봤다. 지원서와 함께 보내야 할 준비 서류를 알아보고, 이메일 주소도 받아적었다. 그리고 무슨 비자로 거주하고 있냐는 질문에 나는 있는 그대로 결혼비자로 거주중이라고 했더니 "그건 좀 곤란한데요."라는 답을 받았다. 나도 이미 예상했던 상황이라 "아..네~. 그래도 고려는 해주셨으면 합니다. 지원서 및 필요한 서류들을 이메일로 보내겠습니다." 라고 전화를 끊었다. 아는 친구의 말로는 대사관 규정상 기밀정보 유출의 우려가 있어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은 우선적인 선발에서 배제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오히려 솔직하게 얘기를 해준 것에 감사했다. 하지만 나의 의심이 현실로 바뀌었고, 그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프리랜서 통역이라 한국에 온 미얀마 사람들과 자주 만나게 되고 그때마다 나의 정체를 숨기고 같이 생활했다. 남자친구 있어요? 라는 질문에 무답으로 웃으며 넘어가고, 무슨 비자로 거주하고 있냐는 질문에는 구직비자라고 거짓으로 대답을 하고 넘어간다. 나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왜 당당하지 못하는 건가?. 스스로 분하고 실망스러웠다. 나 스스로도 외국인 남편을 둔 내가 죄인이라고 무의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오늘 큰 다짐을 하게 되었다. 나는 오늘부터 그 누구에게도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부끄럽거나, 두려워 숨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누군지를 밝힘으로서 나에게 돌아올 차별, 폭언, 불이익을 감당할 준비와 각오를 다졌다.

 

차별 없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세계가 형성될 때를 기다리며~~~

 

ayeayeaung

:
Posted by 해맑은순이
2019. 2. 24. 16:34

편견에서 폭력으로 생활2019. 2. 24. 16:34

편견에서 폭력으로


    편견이나 선입견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 편견이 자신의 머리 속에서만 살아 숨쉬고 있는 건 아무 문제 없지만 그 편견이 상대방을 향해서 말로, 행동으로 변형됐을 때 폭력이 되어버린다. 

   2019.02.23.(토요일) 아침에 눈 뜨자마자 휴대폰을 봤는데 이메일 2통이 들어와 있었다. 전 날에 미얀마어 과외비를 물어온 이메일 소유자한테서 온 회신 메일이었다. 미얀마어 과외비를 물어보니까 미얀마어에 관심이 있어보였고, 한편으로 우리 미얀마에 관심이 있는 분들도 종종 계시네~ 라는 약간의 희망이 생겼던 건 사실이었다. 메일을 열어보기 전에 기대감이 있었고 가슴이 두근걸렸으며, 막상 메일을 열어보고 나니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멍해지고 뭐라고 답장을 써야 되는지 모르는 것이었다. 섭섭하기도 하고,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라는 실망감, 정말 머리에 벼락 맞은 것처럼 어지럽고 앞이 안 보였으며 멍하고 한동안 앉아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딱 한 마디만 답장을 써서 보냈다.

    개발도상국 혹은 후진국의 언어는 언어라고 취급 안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순간적으로 우리 나라가 가난해서 우리 나라 언어, 우리 나라 사람을 이렇게 비하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도 일을 하면 세금도 내고, 돈을 쓰면 부가세를 내면서 살고 있는데 말이다. 외국인이라고 즉 미얀마인이라고 미얀마의 물가에 맞춰서 밥값, 교통비, 커피값, 집값 등의 비용을 싸게 받아야 한다는 법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외국인이라고 즉 미얀마인이라고 인건비를 미얀마 수준에 맞춰서만 받아야 한다는 법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정말 그 메일을 읽어보고 충격이 컸고, 마음 상처 받았다. 한국에서 유학생으로 2년 반, 결혼 생활 8개월 정도 지내왔는데 이런 언어 폭력을/무시를 당해본 적은 처음이다. 즉 미얀마인이라고 차별을 당한 건 처음이었다. 물론 사소한 일로, 간접적인 차별은 있었으나, 이렇게 직접적으로 언어 폭력을 당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일로 인해서 잠자 있었던 나의 박사 꿈을 되살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진정한 선진국 국민이 되는 날을 기다리며~~~ 


mm.aaa.kr


:
Posted by 해맑은순이